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문단 편집) === 형성 === 1848년 3월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카이저|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1830.8~1916.11, 재위 1848.12~1916.11)는 신 절대주의 (바흐 절대주의) 통치를 유지했지만 국내의 많은 불만을 샀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프랑스 제2제국]] 연합군과의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패하여 [[롬바르디아]]를 상실함과 동시에 북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잃었고(1859.7) [[독일 연방]]에서는 북독일의 [[프로이센 왕국]]을 무시하다가 발발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전해(1866.7), 프라하 조약으로 독일 연방에서 축출당하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스스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모두 있어야 진정한 독일 국가를 이룬다"고 말했을 정도로 웬만해서는 오스트리아와의 타협을 원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 주권 국가로서의 평등한 협상을 거부하자 끝내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쫓아냈다.] 동시에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편에 가담한 신생 [[이탈리아 왕국]]에 의해 [[베네토]]까지 상실하며 이탈리아 반도와 독일 연방에서 완전히 배제당했다. 오스트리아가 사르데냐-피에몬테와 프로이센에게 연패를 당하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영향력을 잃어버리자[* 게다가 자신들을 패배시킨 그 사르데냐-피에몬테와 프로이센이 마침내 자신들의 영향권이었던 [[이탈리아 통일|이탈리아와]] [[독일 통일|독일을 통일]]하고 [[이탈리아 왕국|신흥]] [[독일 제국|세력]]으로 등장하자 더욱 속이 쓰렸다.] [[합스부르크 가문|합스부르크 황실]]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잇따른 전쟁으로 인해 제국은 재정 위기에 직면했으며 신 절대주의 체제 아래에서 억눌려 있던 소수민족들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제국이 공중분해될 것을 우려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국과 황실을 보전하기 위한 타개책으로 종전의 신 절대주의 체제를 철회하고 이때까지 가장 강력한 저항 세력이자 제국 안에서 2번째로 많은 인구 비중을 차지하는 [[헝가리인]]과 [[대타협]](Ausgleich)을 맺고 이중 제국 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황제의 제안을 받은 헝가리인 지도층 사이에서는 제안의 찬성 여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다. 헝가리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던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황제의 제안에 반발했고 헝가리인들 대다수 역시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정신에 대한 배신이라며 반대하는 모양새였다. 반대로 친 합스부르크 성향의 헝가리 자유주의자들은 제안에 찬성하였는데, 헝가리 자유주의자의 대표격이며 훗날 자유당을 창당하는 [[데아크 페렌츠]]는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에는 헝가리의 독립을 열렬히 지지하던 민족주의자였으나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극단주의자들과 결별하고 합스부르크의 지배 아래에서 오스트리아와 연합을 추구하는 쪽으로 의견을 바꿨다. 더 부유하고 산업화가 잘 된 오스트리아와 동행하는 것이 헝가리에게 이득이라는 경제적 계산과, 대타협을 통해 피지배자에서 지배자로 헝가리인들의 정치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지지를 통해 헝가리 내 소수민족들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동시에 있었다. 하지만 헝가리인들은 대타협 유지파 정당인 데아크당에게 표를 주지 않았고 중도좌파나 극좌파에만 표를 주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데아크당은 [[성 이슈트반 왕관령|트란스라이타니아]]의 비(非)헝가리인 소수민족들이 몰표를 던져줘서 간신히 절반 이상의 의석을 점할 수 있었다. 헝가리인들이 갈망했던 독립은 오히려 그들이 무시하던 소수민족에 의해 실패하게 된 것이었다. 새로운 외무부 장관이 된 반프로이센파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보이스트 백작(Friedrich Ferdinand Graf von Beust, 1809 ~ 1886)이 재상으로 재직중인 오스트리아 역시 프로이센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교착상태에 빠진 헝가리 문제를 빠르게 끝내야 했기에 협상에 적극적이었고, 이렇게 양측의 계산이 일치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정부와 헝가리 자유주의자들 간의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헝가리의 지도자들은 첫번째 조건이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성 이슈트반 왕관령]]의 사도왕으로써 즉위해야 한다고 통보를 하였다. 그리하여 [[1867년]] [[6월 8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부다페스트]]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동시에 공식적으로 이중제국을 탄생시킬 새로운 법률을 승인하고 공표하였다. 헝가리 대표 데아크 페렌츠가 서명하고 새로 구성된 헝가리 의회가 이를 비준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하였다. 대타협은 본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황제가 가지고 있던 헝가리 왕위를 분리해서 [[헝가리 왕국]]과 의회를 독립시키되, 헝가리의 왕위만은 계속 합스부르크 황제가 차지하는 일종의 [[동군연합]]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에는 공동의 중앙 정부 조직이 있었으므로 단순히 칭호만 공유하는 인적 동군연합(personal union)이 아닌 물적 동군연합(real union)으로 간주된다. 이 타협에 의거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는 헝가리 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제국의 중요한 업무인 국방, 재정, 외교는 동일한 대신이 관장하기로 하였다. 나머지 사항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따로 내각과 각료를 두어 처리하기로 하였고 재정 분담금과 관세 등의 사안은 10년마다 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헝가리의 불만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는 [[독일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였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치세 후반기에 헝가리 의회가 군대 내의 독일어 사용에 대해 불만을 품고 헝가리어를 동등한 위치로 올리려고 하자, 황제는 헝가리 국민의 투표권을 개정해 빈민과 농민이 대거 참정권을 가지도록 해서 언어 운동을 주도한 헝가리 귀족들을 제압하려고 했다. 그러자 언어 운동 지지자들은 재빨리 황제에게 지지를 보내며 꼬리를 내렸다. 내가 잘나지는 것보단 나보다 못난 게 나만큼 잘나지는 걸 막으려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헝가리 왕국 내에서조차 [[슬로바키아인]], [[세르비아인]] 등 다수의 민족 집단이 있었고 심지어 독일계 역시 소수민족으로 존재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에도 [[이탈리아인]], [[슬로베니아인]], [[체코인]], [[폴란드인]]이 소수민족으로 있었으며, 양국 공통의 소수민족은 [[유대인]]과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